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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공병호의 경영 한 수] 인생이 꼬여 풀리지 않을 때



인생이 꼬여 풀리지 않을 때


영국수상 처칠 ‘정치인생 끝났다’ 선고 여러 번
65세에 총리당선 … 2차 대전 승리 이끈 최고 리더



여러분의 인생이 술술 잘 풀리기를 바란다. 그러나 모두에게 그런 행운이 함께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때로는 인생이 난마처럼 꼬이고 꼬여서 앞이 잘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영국수상 처칠도 초년운은 꽝

인생에 정답이 없는 것처럼 어려움을 이겨내는 일도 누구에게나 꼭 맞는 답을 찾기 힘들다.
우리가 쉽게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은 다른 사람의 인생에서 교훈을 얻는 일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이 시대가 대단한 시대”라거나 “이 시대는 다른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르다” 등의 표현을 하지만 사람 사는 세상은 언제나 비슷비슷했다.
승리의 자리에 서는 일은 고단한 노력을 요구하였고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상에 서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이 나오게 마련이다. “저 양반은 이제 불가능해”라는 단정적인 표현을 받은 사람들이 기사회생하여 경주의 끝자락에서 역전 드라마를 만들어 내는 경우가 드물지만 일어난다.
그동안 자서전이나 평전을 통해 만났던 인물들 가운데 영국 수상을 지냈던 윈스턴 처칠의 인생은 극적이라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이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오름과 내림을 반복하였던 그의 인생은 좌절에 빠진 사람들에게 귀한 교훈을 던져주는데 인색함이 없다. <처칠>이란 책을 집필한 런던대학교의 현대사 교수인 존 램스덴은 처칠의 인생사를 두고 ‘서사시처럼 인생을 살아나간 사람’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한 인물의 진정한 힘은 역경을 극복하고 이겨내는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다. 대부분은 쓰나미처럼 밀어닥치는 역경 앞에서 좌절하고 낙담해 버리지만 위대한 인물은 이를 헤치고 마침내 승리를 거둔다. 사회적으로 존경할 만한 위치에 오른 사람들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평범한 촌로의 삶에서도 이런 위대함을 확인할 때가 있다.
윈스턴 처칠은 영국인 아버지와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출생 배경은 좋았지만 생각보다 그의 인생 초년은 제대로 풀리는 것이 없었다. 아버지는 41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았고 이후 어머니는 재혼과 이혼을 반복하였다. 영국의 최고 명문 이튼스쿨 다음으로 인정받는 해로스쿨을 다녔지만 성적은 바닥을 헤매었다. 대학진학도 3수를 해서 천신만고 끝에 사관학교를 입학하게 되었다. 훗날 죽음 이후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제공하고 존경을 받는 정치인으로 입신하게 될지 어느 누가 예상할 수 있었겠는가?



잘나가다가도 불운이 또다시

정치인으로서의 추진력은 눈에 부실 정도로 찬란함 그 자체였다. 보수당 소속 하원의원으로 첫발을 내딛게 된 처칠은 식민지 차관, 통상장관, 내무장관을 거쳐 마침내 해군장관의 자리까지 오르게 된다. 40대까지 그의 경력은 승승장구라는 표현을 사용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특히 해군장관 시절 그는 전임자와는 완전히 다른 선택들 예를 들어, 탱크 개발 지원, 부대 재배치, 지휘관 교체 등을 통해 철저한 전쟁 준비를 한 다음에서야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을 맞게 된다. 그의 리더십 가운데 독특한 점은 전임자의 노선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새로운 직책을 맡으면 늘 자신의 관점에서 그 직책에서 수행해야 할 업무를 새롭게 재정의함으로써 처칠다운 리더십과 성과를 보이게 된다.
그가 영국 정치인의 꽃에 해당하는 수상이 되는 것은 확실하였다. 하지만 큰 불운이 그를 덮치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5년 당시 영국군 육군장관 키치너는 해군장관 처칠에게 독일의 연합국이던 오스만투르크(터키)의 배후를 공격하여 러시아와의 연합을 도모하는 방법으로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한 갈리폴리 상륙작전’을 하자고 제안한다. 이 작전에 동의한 처칠은 이후 주도적으로 상륙전을 진행한다. 하지만 육군 지원을 약속했던 키치너 장관은 여러 번의 번복 끝에 육군의 참전을 거절했고, 해군 단독 작전으로 변경하게 됐다. 결국 영국군은 잦은 작전 변경으로 시간을 낭비하게 된 사이 정보를 입수한 터키군이 상륙전을 대비하게 하는 치명적 실수를 범하게 된다. 전투 결과는 연합군 25만명 사상이라는 엄청난 참패를 기록하였다.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가? 실질적인 책임은 전쟁장관이 져야 했지만 해군장관이었던 처칠이 모든 책임을 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말았다. 처칠은 자신이 모든 통제권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 리더는 아무 것도 수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체험하였지만 ‘전쟁 패배의 원흉은 윈스턴 처칠 해군 장관이다’라는 통념을 제거할 수는 없었다. 그는 장관직에서 쫓겨나듯이 사임하고 온갖 오명을 덮어쓰게 됐다.


기회 와도 연속되는 실수들 … ‘정치인생 끝났다’ 평가도

그러나 운명은 그를 완전히 버리지 않았고 오뚝이처럼 재기에 성공한다. 1917년에 새로 구성된 연립 정권은 그를 다시 군수장관으로 임명하여 제1차 세계대전 이후까지 전쟁장관직을 역임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갈리폴리 사건의 오명을 뒤집을 수 있는 성과를 올리기 보다는 몇 가지 결정에서 성급하고 판단력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할 실책들을 범하고 만다. 정적들이 그를 공격할 때 즐겨 사용하였던 처칠의 실수 목록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1915~6년 터키 갈리폴리 상륙작전 실패, 1919년 러시아 혁명 개입 사건, 1924년 보수당으로 복귀한 기회주의적 사건, 1925년 금본위제도 복귀로 수출품가격 인상과 고실업을 가져온 사건, 1926년 총파업의 단초를 제공한 사건, 1930~5년 인도 대의정부 수립에 반대한 사건, 1936년 영국 국왕 양위사건(영국 국왕 에드워드 8세가 미국 이혼녀 심프슨 부인과 결혼하기 위해 영국 왕위를 양위한 사건으로 처칠은 에드워드 8세의 편을 들어 국민들의 분노를 샀다)에서 ‘엉뚱한’ 편에 섰던 판단 실수 등이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판단 실수는 처칠 자신이 총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국민들로부터 미움 받던 왕 에드워드 8세의 입장을 지지한 일이다. 당시 그의 나이는 62세였다.
그를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더 이상 윈스턴 처칠의 정치적 재기는 불가능할 것으로 내다보았다. 이를 말해주는 한 가지 에피소드가 전해 온다. 조지 버나드 쇼, 필립 커, 에스터 부부 등으로 구성된 영국 사절단이 1931년 러시아를 방문한 적이 있다. 방문자 목록에 속해 있던 한 인물이 용감하게도 스탈린의 면전에서 “러시아가 왜 군비를 증가합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돌아온 답은 뜻밖이었다. 스탈린은 아주 매력적인 태도로 답하였다. “윈스턴 처칠이 다시 집권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내가 어떻게 미리 알 수 있습니까?” 그러자 사절단은 한 목소리로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술집 문 닫을 때까지 버틴 사람이 승자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사이에 처칠에 대한 비난은 하늘을 찌를 정도였고 그의 명성 또한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추락하고 말았다. 세상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비난하기 시작하면 배포가 있는 사람도 흔들리게 된다. 그의 자서전을 읽다보면 아무리 걸출한 인물이라도 위기 앞에서는 흔들릴 수밖에 없는 인간적인 연민을 느끼는 대목이 등장한다. 그의 정치적 위상이 흔들리게 주변으로부터 “당신은 끝났어”라는 목소리를 높일 때 그 자신도 장래를 걱정하게 된다. 1929년의 어느 날 아내에게 이렇게 속마음을 털어놓는 적이 있다.
“이제까지 정치를 계속하고 있는 것은 딱 한 가지 목표인 총리가 되기 위한 것인데, 만약 이게 어렵다면 재산을 다 팔고 캐나다로 이민 가서 가족들을 위해 큰돈을 벌고 싶다.”
사실 그는 1929년을 전후해서 미국의 경제 상황을 오판해서 내린 주식 투자 결정으로 말미암아 경제적으로도 매우 곤궁한 처치에 있었다. 정치적 위상의 추락과 경제적인 곤경을 동시에 경험함으로써 그 자신도 미래에 대한 희망이 흔들리고 있었던 셈이다.
그때 그가 백기를 들고 캐나다 이민을 선택하였더라면 어떠하였을까? 세계 역사의 물줄기가 다른 방향으로 흐를 수도 있었다. 그가 1936년 영국왕의 양위사건에 대한 판단 실수를 기점으로 은퇴해 버렸다면 역사에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였을 것이다. 노년에 “술집이 문을 닫을 때까지 끝가지 머문 사람이 승자가 되는 법이다“라는 명언을 남긴 적이 있다. 히틀러가 유럽을 전쟁으로 몰고 가면서 1940년 65세로 총리에 당선되고 만다. 이후 2차 세계대전을 이끌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종전과 함께 노동당에 패배하고 물러난 이후에도 다시 1950년대 초반에 총리에 복귀하였다. 그는 인생 후반전에 신화적 명성을 구축하는데 성공한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다.
살면서 어려움을 만날 때면 두 가지를 기억하기를 권하고 싶다. 하나는 어려움 또한 봄날처럼 지나가 버린다는 사실이다. 다른 한 가지는 묵묵하게 견뎌내다 보면 현재의 어려움이 새옹지마가 될 수 있다는 사실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