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은 새가슴
속은 타도 웃는다
“잠이 안 온다!”
세상은 보기와 다를 때가 많지만 사장이라는 자리보다 더할까? 누구나 사장이 되면 하고 싶은 것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줄 알지만, 막상 앉아보면 생각과 현실은 하늘과 땅 차이다. 하고 싶은 건 많지만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다. 잘 나갈 때야 그 무엇도 부럽지 않지만 회사와 직원을 이끌어야 한다는 책임감은 바윗돌처럼 가슴을 짓누른다.
하지만 내색할 수 없다. 사장의 얼굴은 회사의 상황판이라, 사장의 얼굴 표정이 어떠하냐에 따라 회사 분위기가 달라지고, 거래처 응대가 달라진다. 그래서 노련한 리더는 아침마다 스스로 충전한다. 밝고 자신감 있는 표정을 스스로 만들어낸다. 그래야 사람들을 달리게 하고 수시로 일어나는 갈등을 조정할 수 있고 또 다른 내일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그러기에 속이 타고 애가 끓어도 웃어야 한다.
그러면 대기업을 일군 이들은 대단한 심장을 가졌을까? 사실 알고 보면 의외로 ‘소심하고 쩨쩨’하다. 예를 들어 이병철 삼성그룹 전 회장은 당시 삼성그룹 고문을 맡고 있던 이창우 성균관대 교수에게 어느 날 이렇게 말했다. “회사가 ‘잘 되고 있구나’ 생각이 들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이 상태가 언제까지 계속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몰려온다. 지금도 내가 중요한 일을 빼먹지 않았는지, 잊어버린 것은 없는지 불안하다.” 하지만 이들이 다른 게 있다. 자신에게는 소심하고 쩨쩨해도 남에게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이게 다른 점이다.
내가 냉혹하다고?
리더는 냉혹하다. 아니, 냉혹해야 한다. 냉혈한이어서가 아니다. 이 사람에게도 좋고 저 사람에게도 좋은 호인(好人)인 사장은 회사를 망친다. 우유부단한 호인은 위기상황이 됐을 때 단호한 결정을 못 내린다. 나쁜 결정을 내리는 것보다 더 나쁘다.
‘한국의 피터 드러커’라고 불리는 윤석철 서울대 교수는 2005년 정년퇴임을 앞두고 한 인터뷰에서 “기업 경영의 기본은 투명 경영이 아니다. 생존이 기본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해를 끼치는 직원이나 해를 끼치지 않더라도 조직의 미래를 위해 떼어낼 필요가 있을 때는 그렇게 해야 한다. 회사의 존재 이유는 이익이고 CEO의 존재 이유는 이익의 실현이다. 사람 좋으면서 이익을 실현하지 못하고 인재를 키우지 못하는 리더는 이미 가치를 잃은 셈이다.
사장들은 왜 바람을 피우나
우리는 이런 말을 하곤 하지 않는가. “명색이 남자로 태어났으면 사장자리 한 번 앉아봐야 하지 않겠어?” 일부이기는 하지만 ‘바람’을 타는 사장들이 있다. 이상한 건 ‘바람’을 타는 상대가 양귀비만큼 예쁘지 않다는 것이다. 대단한 외모는 가지지 못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사장들의 말을 잘 들어준다. ‘오늘 사무실에 책상이 하나 들어왔는데 말이야…’, ‘어제 만난 그 아저씨 같은 사람 있잖아…’ 이런 시시콜콜한 얘기를 잘 받아준다. 그 어느 누구도 받아주지 않을 말들을 잘 받아 재미있는 대화로 이끌어간다. 혼자 이리 뛰고 저리 뛰다 보니 외로운 마음이 된 사장들이 자기도 모르게 만나게 되고 기대게 되는 사람들이다. 물론 사장이라는 자리를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말도 안 되는 소리일 것이다.
외로움은 리더가 감내해야 할 병이다. 외롭지 않으면 리더가 아니다. 사장이라는 자리 자체가 외로운 자리이기 때문이다. 회사 상황이 좋지 않을 때나 회사의 운명을 좌우할 수도 있는 결정을 내려야 할 때, 그 누가 같이 해줄 수 있을까? 해줄 수도 없고 해주어서도 안 된다. 결정은 사장의 고유 권한이기 때문이다. 의견과 조언을 들을 수는 있지만 아무도 최고 결정권자를 대신할 수는 없다. 결정도, 그에 따른 책임도 CEO의 몫이다.
울적하거나, 고민거리가 있어도 툭 터놓고 상의할 사람이 없다. 평생 같이 사는 배우자라도 똑같은 얘기 세 번 하면 고개를 돌린다. 사장이 하는 얘기는 항상 다르지만, 상대는 항상 똑같다고 생각한다. 친구나 선후배와도 즐거움을 나눌 수 있지만 고민을 나눌 수는 없다. 직원들에게 털어놓을 수 있을까? 큰 일 나기 쉽다. 그러면 같은 고민을 하고 있어서 이해해 줄 수 있는 경쟁회사의 사장은? 결국 대화 상대는 자기 자신밖에 없다. 사장들은 결국 그렇게 홀로 남겨져 남모르게 끙끙 앓는다.
사장도 인공호흡이 필요해
자금이 달려 발을 동동 굴러도 어디서 돈 한 푼 나올 곳이 없을 때, 직원이 일을 저질러 뒷수습을 해야 할 때, 거래처 접대한다고 나간 직원이 오히려 회사 먹칠하는 행동을 했을 때, 거래 성사됐다가 급작스럽게 취소됐는데 알고 보니 다른 아는 집과 거래를 할 때, 이젠 일 좀 하는구나, 하던 직원이 어느 날 갑자기 그만둔다고 할 때, 일만 해도 바쁜데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이 닥쳐올 때… 사장은 막막하다. 답답함을 넘어 멍하다. 그렇다고 어디다 풀 데도 딱히 없다.
“요즘엔 감정 조절이 잘 안 돼요. 술이라도 한 잔 하면 가슴이 싸해지는 공허감이 밀려드는데 그럴 땐 죽을 것 같아요.”
한 대기업 임원의 말이다.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생존을 찾아야 하는 리더들의 고민은 한층 깊어지고 있다. 굼벵이 같은 회사는 전쟁터에서 살아남을 수 없으니 조직을 달리게 해야 하는데 어떻게 달리게 할 것인가? 생각은 한숨이 되고, 한숨은 고민이 된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잠이 오지 않는다.
모든 일이 사람으로 시작되고 사람으로 끝나는데, 이 세상 그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왜 나와 함께 할 사람은 이렇게도 없을까? 이 마음을 알아 줄 사람이 왜 이렇게 없을까? 잘 되면 다들 자기네들이 잘해서 그렇다고 하고, 안 되면 사장만 쳐다본다. 빨리 어떻게 해달라는 것이다. 사장도 인간인데 뭘 어쩌란 말인가? 섭섭하고 서운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고객에게 잘하라고 그렇게 말해도 결국 고객을 이기고야 마는 직원들, 그런 고객이 다시 오겠는가? 뭐라고 한 마디 하면, 되려 한 마디 하고 나가버리는 직원들도 있다. 일 좀 하는 직원이 그러면 가슴에 상처가 생긴다. 내가 좀 더 잘 했어야 했는가? 후회와 불안이 엄습한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는 요즘 같은 시대,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초대하지도 않은 고민들이 줄을 서서 찾아든다. 하루하루 남모르게 떠는 새가슴이 따로 없다. 사실 사장들도 칭찬 받고 싶고, 위로받고 싶다. 나도 모르게 차가워져가는 새가슴을 따뜻하게 만들고 싶다. 누가 그걸 해줄 수 있을까?
도움말 _ 서광원·정리 _ 장여진·참고도서 _ 사장으로 산다는 것(서광원 著/흐름출판)
저자 · 서광원
1991년 경향신문 입사. 1997년부터 식당, 인터넷 벤처기업 등을 설립 운영하다가 2003년 중앙일보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 기자로 복귀, 5년간 경영전문기자를 지냈다. 현재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 소장으로 조직과 리더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한 콘텐츠를 연구, 기업 등에 강연활동을 하고 있다. 2005년 <사장으로 산다는 것>을 출간해 20만 사장의 공감을 얻은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으며, 이후 <살아 있는 것들은 전략이 있다>, <사장의 자격>, <시작하라 그들처럼> 등 10여권의 저서를 냈다. 최근 펴낸 책 <사장의 길>은 지난 10년간 공들여 찾은 ‘사장의 딜레마’에 대한 해법을 실제 사장들이 체험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풀어낸 본격적인 개론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