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에게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 아닌가?
“사업초기에 부도를 맞은 적이 있는데, 그때 돈은 일하면서 갚아 나가면 됐지만 일에 대한 것, 또 나 자신에 대한 고민들이 나를 가장 힘들게 했다. 내가 좀 엉뚱해서 자금이 없어 쩔쩔 매면서도 ‘돈을 왜 모으지?’ 오히려 그렇게 생각했었다. 나 하나 편하게 살려면 회사 꾸리는 데 드는 이 많은 돈 필요 없다. 나만의 것은 의미가 없다. 나만의 것을 넘는 그 뭔가를 만들고 싶다, 이런 생각을 몇 년전부터 하고 있다.” 아임삭의 공구인 장학금의 선정기준은 다음과 같다. 부부합산 사업소득 연간 4,200만원 이하, 직원인 경우 3,000만원 이하이며 이중 동일 조건에서는 학업성적이 우수한 자에게 우선수혜가 주어진다. 대학생은 100만원, 고등학생은 50만원. 시행 첫해인 올해 모두 38명이 수혜대상이 됐다.
연세대 금속공학과 79학번 출신인 김대원 사장은 졸업 후 특이하게도 기업체 취직을 마다하고 용산전자상가에서 혼자만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연대씩이나 나와 용산 세 평 상가에서 날밤을 새는 이상한 놈’, 이것이 아임삭의 시작이었다.
용산전자상가 세 평서 출발… 아무도 못 말리는 고집쟁이 청년

어떻게 사업을 시작하게 됐나?
“처음에는 전자부품쪽 무역을 했다. 아, 그전에 어디 취직을 했는데 만날 번역일만 시키더라. 이거 안되겠다! 때려치우고 방랑생활을 한 1~2년 했다. 천성이 남 밑에 있는 게 안맞나 보더라. 정해진 시간에 출퇴근하는 게 나한테는 죽어도 안맞다 생각했고, 그래서 어머니한테 야단도 많이 맞았다. 당시 김우중의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말이 유행이었는데, ‘무역실무’ 달랑 한권 읽고 무역업을 시작했다. 용산상가에서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요즘에는 이런 성격이 뭐 도전적이다, 창조적이다 할지 모르지만 그때만 해도 살짝 이상한 놈이었다.(웃음)”
가장 힘들었던 적은?
“부도를 맞은 적이 있었다. 전자부품 납품을 하다 상대 업체가 문을 닫았다. 지금으로 치면 약 10억 정도 되는 돈인데, 서른두 살 내겐 평생 갚아도 못 갚을 것처럼 커보였다. 일주일을 못 잤다. 폐인이 되나 했는데, 원래가 엄청 고집이 세고 마음을 먹으면 하고 마는 성격이라 맨주먹만 쥐고 일어섰다. 당시 결혼한 상태였지만 한 4년간 집에 돈을 못 갖다 줬다.”
공구, 특히 전동공구 분야와는 어떻게 인연이 닿았나?
“부도에서 재기하려고 아침6시에 출근해 저녁 11시반까지 일을 했다. 직원 둘을 데리고 일에 미쳐 지냈다. 그러다 전자부품은 부침이 심하다고 생각해 공구로 눈을 돌리게 됐다. 당시 계양과 LS산전 등에 전동공구 부품을 공급하는 일을 했다. 전동공구에 들어가는 부품과 매카니즘을 훤히 알 수 있었고 기술개발에도 참여했다. 본격적인 제조는 1997년. 하필 IMF 터지기 직전이었다. 힘든 것도 팔자려니 했다.”
외국 브랜드 왜 한국시장서 비싸나… 고품질 적정 가격대의 시장성으로 승부
무역을 하다 왜 제조로 돌아섰나?
“90년대 중반부터 인터넷이 발달하니까 무역이 이제부터는 특별한 분야가 아니겠다 싶었다. 어떤 제품이 필요하다면 외국과 얼마든지 인터넷을 통해 연락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직접 만들자! 이렇게 해서 제조를 시작했는데, 정말이지 제조가 이렇게 어려울지는 몰랐다. 한번은 잘못 만들어 전체를 리콜한 적이 있었다. 2000년경이었는데 약 3억원 정도를 리콜시켰다. 회로에 문제가 있었는데, 돈보다 내가 왜 실수를 했나 싶어 많이 자책했다. 품질을 강화해야겠다, 정말 답은 품질 뿐이구나 그때 많이 공부했다.”
아임삭이 가진 핵심기술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