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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공구업 미래를 보장하는 일, 지금 내 세대가 할 일



공구업 미래를 보장하는 일,
 
지금 내 세대가 할 일


2013중소기업인대회 대통령상 수상 ㈜케이비원 김정도 회장


케이비원 김정도 회장이 2013전국중소기업인대회에서 모범중소기업인상 대통령 표창을 수상했다. 이 상은 기업성장과 경영혁신, 이를 통한 고용창출의 공을 이룬 기업인들에게 수여하는 상으로 김정도 회장이 최고상인 대통령 표창을 받음으로써 공구유통의 중요성과 국가경제 기여도를 알리게 됐다.
케이비원은 1968년 대구 북성로에서 경복기공사로 시작됐다. 1971년에 무역업을 개설했고, 이후 매년 20% 가까운 성장세를 보이며 산업공구유통업이 취급할 수 있는 품목을 가장 먼저 선점해 왔다. 현재는 직원 250여 명에 매출액(2012년 기준) 1천 2백억 규모. 이번 수상을 즈음해 ‘김정도’라는 한 기업인의 성장과 업계 변화, 나아가 앞으로의 시장을 바라보는 고민에 대해 들어봤다. 김 회장은 ‘앞으로 30년, 시장이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먼저 꺼내놓으며 쉽게 답을 내놓지 못했다. 그만큼 대기업의 확장과 중소상공인의 상생이 화두가 되는 오늘날의 경제에서 업계 리딩기업으로서의 답이 쉽사리 나오지 않음을 에둘러 표현했다. 정도(正道)와 품질경영, 뛰어난 마켓감각으로 인정받는 케이비원 김정도 회장을 만났다.



새벽 4시 청계천의 추억


대구시 북성로.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우리나라 경제인구 활동이 활발했던 곳이다. 인근의 수창초등학교는 국회의장, 영부인 등이 수학했을 정도로 50년대 당시 대구의 중심지였다. 경북 옥포면이 고향인 김정도 회장 역시 이 수창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어릴 적 고향마을서 꽤 유복하게 자라 일찍 대구로 유학을 왔다. 어머니와 단둘이 찍은 천연색 사진을 보이며 김 회장은 “당시 학교에서 양복 입은 아이는 나 혼자였다”고 특유의 환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에게 황금 같은 행복한 유년시절이었다.
중학을 다닐 무렵 가세가 기울었다. 열여섯에 친척이 하는 대구 북성로의 한 철물점에 취직을 했다. 말 그대로 철물만 취급했던 만물상이었다.
“1960년에 삼익줄이 생겼어요. 소달구지에 기계 싣고 오던 시절이었으니 우리나라의 산업수준이라는 게 참 어려웠지요. 공구라고 해야 볼트 너트가 대부분이었으니까. 나는 1962년 볼트 너트부터 시작해서 이 공구를 배웠어요. 당시 대구에 삼공물산 코오롱 등 굵직굵직한 섬유회사들이 있었는데 그런 회사의 섬유기계에 들어가는 공구가 꽤 잘 됐어요.”
당시 한국에 비해 선진국이었던 일본을 배우고 싶어 일본친구와 펜팔도 이어갔다. 이때 배운 일어가 이후 일본무역에 결정적 도움이 됐다. 6여년 후 공부도 하고 독립도 하고 싶어 친척가게를 그만두겠다는 결정을 했다. ‘객지 설움’이란 것도 느껴봤다고 귀띔했다. 저녁 8시에 타서 새벽 4시에 도착하는 기차를 타고 난생 처음 서울이라는 데를 가봤다. 깜깜한 새벽에 서울역에 떨어져 청계천까지 걸어갔다. 대한민국 공구 1번지 청계천도 이때 처음 봤다. 새벽어둠이 걷히는 청계천변에 선 스물하나의 청년 앞에 공부는 생각해보니 언감생심이었다. 친구를 만나 딱 하루 젊음을 만끽했다. 두 번 다시 청춘을 즐기는 싶다는 마음이 들지 않도록 원 없이 놀고는 생업으로 돌아왔다. 먹고 산다는 현실을 알아버린 그는 1968년 북성로의 두 평짜리 가게에서 창업을 했다. 내심 ‘잘 되겠지’하는 안일한 마음도 있었다.
“그런데 웬 걸요. 사업이란 게 요만큼도 만만한 구석이 없는 거야. 친척집에 일할 때는 새벽에 일어나 공부하고 펜팔 친구한테 편지 쓰고, 저녁이면 책도 읽고 했는데, 사업을 시작하고 몇 년간을 그 일본친구한테 편지 한 줄도 못 썼어요. 잘 되도 걱정이고 못 되도 걱정이라서 편지 한 줄이 안 나오는 거야. 결국 결혼 10년 후에야 오사카에서 그 일본 친구를 다시 만났어요. 세월이 훌쩍 지났더라고. 참 감회가 새롭대요. 아, 내 청춘이 이 공구업하면서 다 지나가는구나!”


볼트 너트로 시작 … 혁신과 변화가 생존 조건


1968년 창업당시 이름은 경복기공사. 김정도 회장은 공구유통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한 눈에 짚었다.
“그때는 철물시대를 지나서 처음으로 기계공구가 움직이던 시기였어요. 그래서 상호에 기계공구라는 뜻의 기공사를 붙였고, 이후 측정기기, 제어기기 등을 취급하면서 기계공구 범위를 벗어나니까 ‘기기’라는 명칭을 쓰게 됐습니다.”
김 회장은 공구가 가장 많이 쓰이는 자동차와 건설 현장을 예로 들며 공구 발전상을 짚기도 했다. 성능의 발전상으로 봐도 좋다.
“60년대는 볼트 너트가 많이 쓰였는데, 지금은 이 모든 것이 체결공구라 해서 화스너(fastener)라 불립니다. 동력원별로 보면 70년대는 에어공구, 90년대는 전동, 2000년대는 충전공구로 변했습니다. 즉 현장의 불편을 해소하면서 공구의 성능도 좋아진 겁니다. 돌아보면 저 같은 경우 볼트 너트 팔면서 시작했는데, 그런 회사가 이만큼 바뀌었으니 세상도 많이 달라졌지만 스스로도 얼마나 혁신을 했겠습니까.”


 
70~80년대 경복기공사는 업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기업이었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 머물지 않고 대구본사를 직원들에게 맡기고 무역업무가 서울본사로 이관되면서 이내 서울로 올라가 1991년 전국시장 진출을 꾀했다. 김 회장은 당시 동대문의 좁은 방에 묵으며 서울시장을 타진하던 그때를 잠시 떠올렸다. “방이 얼마나 작았는지 발을 쭉 뻗으면 문밖으로 발이 나왔다”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세월을 거치며 서울 부산으로 공구유통 영향력을 뻗어갔다.
한편, 무역을 하면서 세계 산업현장이 돌아가는 것을 앞서 볼 수 있었던 그는 업계에서 늘 한발 앞서 첨단제품을 취급했다. 대구본사와 서울을 연결하는 역할을 했던 팩시밀리와 당시 웬만한 집 한 채 가격이던 최고급 외산 컬러복사기를 업계 최초로 도입해 업무환경을 꾸몄다. 또한 브라운관, 모니터 제품의 갑류무역 수입대행을 시작했다. 80년대에는 반도체와 계측기를 취급키도 했다. 90년대 후반 한국최초의 DIY전문점 ‘핸디(HANDY)’를 열었다. 일본과 일찍 무역을 해 라이프 스타일의 변화를 감지한 덕분이었다. 일본 팬시제품부터 DIY, 리빙스타일 제품까지 갖춰 납품이나 도매가 아닌 최종 사용자를 만나는 리테일샵이었다. 하지만 비즈니스는 멀리보다 반 발짝만 앞서 보라는 말이 있듯이 너무 이른 판단으로 3년 만에 접는 시련을 맛보기도 했다. 이후 다시 건축자재백화점인 하우징파크를 열었는데, 이 또한 일찍 시도해 시장에서 재미를 보지 못한 경우다. 이 모든 것이 현재 공구유통의 흐름인 원스톱 토탈 개념과 일치하는 것으로, 결국 그가 앞으로 어떤 분야에 투자할지 점쳐지는 대목이다.




내 친구 최영수를 말하다
 
사실 그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가 있으니 바로 크레텍책임의 최영수 사장이다. 나이도, 고향도 같은 데다 공구유통 1, 2위를 점하고 있어 언제나 업계에서는 두 편을 비교한다.
“고향에 살 때는 서로 몰랐습니다. 나중에 사업을 하다 고향사람이란 걸 알았어요. 같은 고향에서 공구업 전국 1, 2위가 나왔다는 것, 참 특이하고 또 자랑입니다. 재밌는 이야기 하나 할까요? 제가 처음 공구상 일을 할 때 북성로는 공장에 납품하며 가게 세를 내는 가게들이 있었고, 근접한 인교동 골목은 행상들이 많았어요. 그런데 인교동서 장사하던 크레텍책임의 최영수 사장이 나보다 더 크게 성공했잖아요. 참 대단한 사람이에요. 아마 80~90년대 저희회사가 무역에 집중할 때 크레텍은 국내수공구 시장에 집중했는데 이게 주효했던 것 같아요. 경쟁하며 지금까지 왔지만 인정할 건 해야지. 그 친구는 의지와 노력이 어마어마한 사람이야. 그 친구 덕분에 나도 이만큼 왔고, 그 친구도 나 덕분에 그만큼 된 거예요.”
굳이 두 사람을 비교한다면 김 회장은 다방면에 관심이 많아 시대를 읽는 감각이 탁월한 반면, 크레텍책임의 최 사장은 한 분야에 깊이 몰두하는 집중형이다. 그런 만큼 두사람이 만나면 공구유통업의 현재와 미래가 한 눈에 들어올 수 있다.
현재 국내 공구유통 3사의 특징을 분석하자면 크레텍책임은 수공구, 케이비원은 측정, 동신툴피아는 절삭에 강하다는 평이 있다. 물론 오늘날은 통합시대니만큼 이런 분석이 앞으로의 시장판세에 큰 의미는 없지만, 케이비원이 측정과 제어 공구 시장에 얼마나 많은 투자와 기술력을 쏟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김정도 회장은 “70년대는 무역제한조치가 있어서 국내에 있는 품목을 수입하려면 제한이 많았지만 측정은 국내에 없는 품목이었기 때문에 수입하기가 수월했다”며 “그러다보니 측정을 많이 취급하게 됐고 그 제품에 대해 연구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쉽게 들어온 납품 … 결국 위기로
 
가장 큰 위기는 언제였는지 물었다. 의외로 IMF나 외환위기 때가 아니라 운좋게 납품을 대거 성사시켰던 사업초기였다고 그는 술회했다.
“대부분 찾아가서 우리물건 써달라고 해도 거절당하기 일쑤잖아요. 그런데 하루는 그 공장의 담당자가 찾아와서 물건을 제발 넣어달라고 해요. 우리가 좋은 제품 판다고 당시 업계에서 제법 평판이 좋았거든요. 그래서 큰 금액의 납품을 하게 됐는데, 어느 날 그 공장이 부도가 난 거야. 당시 금 한 돈이 3천원이었는데, 부도액이 100만원이었어요. 자본금 30만원을 훨씬 넘어섰죠. 그때 잠도 못자고 속 탔던 건 말로 다 못해요. 돈 떼인 것 받으려고 사방팔방 뛰어다니고 제 정신이 아니었죠. 그 후론 현금거래를 원칙으로 삼게 됐고, 그렇게 예방주사를 센 걸 맞아서인지 98년 IMF때도 우리는 위기를 모르고 오히려 성장했습니다. 덕분에 뭐든 원칙에 맞게 해야 탈이 없다는 것도 알게 된 거죠.”
김정도 회장은 그의 이름 ‘정도(正道)’처럼 즉 바른 길과 원칙경영을 중시했다. 가격에 집중하다보면 유사제품을 취급하게 되는데, 이는 자멸의 길이라 잘라 말한다.
“전선릴 경우 길이를 곧잘 속이잖아요? 지나가던 손님이라면 가격이 싸다면 한번은 옵니다. 하지만 가서 써보고 두 번은 오지 않아요. 50미터라고 해서 사갔는데, 코드에 닿지 않으면 얼마나 화나겠습니까? 기계 고치는데 스패너가 부러져 손을 다쳐 봐요. 얼마나 화나겠습니까. 그래서 공구상 사장님들에게도 말합니다. ‘우선은 이렇게 팔면 득이 되겠지만 나중엔 후회합니다. 나중엔 이 가게에 안옵니다. 정품을 취급해야 꾸준히 고객이 늡니다.’라고 누차 말합니다. 정품, 이거 참 중요합디다. 현재 공구시장의 흐름을 보면 크게 네 가지로 나눠져요. 첨단공구는 공장에서 쓰이고, 개인이 쓰는 것은 취미로 쓰는 것, 한번 쓰고 버리는 것, 그리고 DIY용입니다. 이렇게 다변화된 시장을 어떻게 우리업계가 만족시켜줄지 고민을 해야 할 것 같아요.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변하지 않는 것은 품질로 승부해야지 가격승부는 별 의미가 없을뿐더러 오히려 손해를 가져온다는 겁니다.”


품질우선 정도경영 ...
 
공구유통업 비전 있도록 만들고파
 
김정도 회장은 공구재료를 보는 안목에서도 자신감을 보인다. 일찍 공작기계 밀링 선반 등을 취급하면서 금속소재를 공부해야 했고, 또 측정제품을 취급하면서 국가검증기관도 운영한 바 있다. 재료는 연마 시 불꽃의 색깔과 모양을 보면 일차적인 판단을 할 수 있고 이후에는 검사기를 통해 최종확인할 수 있다. 카본스틸, 몰리브덴, 바나디움, 크롬바나디움 같은 소재와 로크웰 경도 등에 대해 직원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책을 하나 만들까도 구상 중이다.
업계 리딩기업으로 올라서기까지 김 회장은 매일 2~3시간만 자면서 연구를 했다. 제품 및 그 관리에 있어 체계화가 되지 않는 업계에서 전사적 자원관리 시스템인 ERP와 전자결재시스템을 이루고 2006년 직무분석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렇듯 사원들의 직무관리와 역량강화에 힘쓰는 한편, 사원복지에 문화 마인드를 접목했다. 대구 본사 인근 오래된 한옥을 개조해 일대 지나는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한옥식당 ‘경복정’으로 변모시켰다. 최근 북성로 근대 스토리텔링 활성화와 맞물려 공구골목의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또한 김정도 회장은 2008년 10억원을 자본으로 고향인 경북 달성군 옥포면의 후학들을 위해 ‘옥포장학재단’을 설립, 운영하고 있다. 매년 장학생 10~20명을 선발해 3천~4천만원을 후원하고 있으며 장학금액도 증액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장학사업의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5월 대구상의 사회공헌기업으로 등록됐다.
“사업을 하면서 가장 보람될 때는 직원들이 잘 될 때에요. 직원들의 자녀가 잘 됐다, 직원들이 행복하다 할 때 가장 기쁩니다. 그런데 제 원래 성격이 원칙적이고 깐깐해 직원들에게 엄하게 대해 왔어요. 웃으며 농담하는 성격은 사업을 하면서 바뀐 성격 같아요. 그래서 직원들이 우리 사장은 무섭기만 하고 일만 많이 시킨다고 생각할까봐 걱정입니다. 기업의 성장은 인재양성에서 시작됩니다. 직원들에게 많이 투자하고 그래서 사업에 이윤이 나오면 사회에 또 환원해야죠. 그래야 우리 공구업이 정말 비전있는 업종이 안되겠습니까? 현재 공구업은 세대변화를 많이 겪고 있습니다. 전통적 공구업과 현대적 공구업이 공존하고, 그 속에 세대차이가 꽤 드러나고 있어요. 앞으로 10년, 혹은 30년, 공구유통에서 어떻게 먹고 살까, 생각하면 정말 고민스럽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더 잘 알고 있지 않을까요? 젊은 사람들의 생각을 받아들여 펼칠 수 있도록 밀어줘야죠. 미래가 보장되는 공구유통업을 만들고 싶습니다.”


 
케이비원의 장점은 품질과 원칙을 중시하는 경영에 있다. 더불어 외부적으로는 유통업의 트렌드를 선도하는 감각과 최종소비자의 구매스타일을 꿰뚫는 안목을 갖췄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김 회장은 꼭 공구가 아니더라도 스웨덴의 이케아, 독일의 헤펠레, 일본의 도큐핸즈 등 근접 업종의 트렌드를 늘 분석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앞으로 최종소비자를 대상으로 하는 시장이 불붙는다면 케이비원의 잠재력이 꽤 주목할 만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올해 창업 45주년을 맞이한 케이비원. 공구유통의 미래를 보여주는 큰 창이자 든든한 길로 한 번 더 성장하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