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SPECIAL

대전 중앙시장 명물달인, 한신남 사장

한편의 영화 같은
 
‘내 인생도 뜨겁게 달궈졌다’

특수 부대 심해 잠수원 → 중동, 카리브 섬나라 용접공  귀국후 목공장 사업으로 큰돈
 일본 무역회사 통역관  용접달인 예술

 
올백으로 빗어 넘긴 흰머리, 카리스마 넘치는 이목구비, 일흔을 넘은 나이에도 탄탄한 근육을 자랑하는 외모가 범상치 않다. 무거운 쇠파이프 뭉치를 아무렇지도 않게 어깨에 짊어지면 무겁다고 말리던 사람들이 깜짝 놀란다. 이 동네에서 팔씨름하자고 덤비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대전 명물 용접달인이 운영하는 ‘쇠사랑’
 
대전 대표 시장인 중앙시장. 이곳 명물을 찾아왔다면 사람들은 곧장 ‘쇠사랑’에 가보라고 한다. 일흔 넘은 용접달인이 산다는 말에 한달음에 달려온 대전시 동구 인동의 금속공예점 ‘쇠사랑’. 주인장 한신남 사장은 낯선 이를 함박웃음으로 맞이하며 커피도 주고, 목캔디도 건넨다. 지나가던 주민들이 너도나도 들어와 한마디씩 거들고 커피도 마음껏 마신다. 이웃집 사랑방이다. 작업실에는 다음 주까지 물량을 맞춰야하는 일이 한가득 쌓여있다. 그의 실력이 입소문을 타고 모 업체에서 대규모 금속수공예품을 의뢰했기 때문이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탈출구로 해군 입대
 
그가 쇠를 만지기 시작한 건 열일곱 살 때 용접기술을 배우면서부터다. 물론 그 전부터 궂은 일을 해왔다. 충북 충주가 고향인 한신남 사장은 아버지가 가산을 탕진하면서 가난으로 곤두박질쳤다. 어린 나이에 구두닦이, 신문팔이, 아이스케키 장사는 기본. 인쇄소와 보일러 공장에서 일하며 열일곱 살에 본격적으로 용접기술을 배웠다. 대전과 서울 등지를 오가는 고된 하루의 연속이었다. 유일한 탈출구로 군 입대를 생각했다.
“어려서부터 해군에 가고 싶었어. 바다도 실컷 보고 외국도 가보고 섬에도 가보고 말아야.”
누구나 기피하는 군대를 자진해서 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호적에 이름이 잘못 올라가 있어 영장이 안 나왔기 때문이다. 호병계에 찾아가 이 사실을 알아내고 자원하려니 이번엔 학력이 문제였다. 해병은 고등학교 졸업자만 지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때 근무했던 인쇄소 친구의 도움으로 졸업증명서를 만들었다. 잘못이라는 건 알지만 그 정도로 입대가 간절했다. 키도 큰 편, 체력도 좋고 태권도도 3단, 아이큐도 148. 최종 합격이었다.


포탄 케이스 보일러 시공이 화근
동료들의 질투와 구타, 한참 늦은 전역
 
기대했던 군 생활과는 달랐지만 용접기술 덕을 봤다. 포탄 케이스를 펴서 보일러를 만드는 것이 성공한 것이다.
“당시에는 가정용 보일러가 없어서 장교들도 추위에 떨었던 시대였어. 보일러 설치 이야기가 우연히 나와서 함포로 썼던 40mm 포탄 케이스로 보일러를 만들었지. 한달 동안 모 대위 집에 처박혀서 말야. 그리고 성공을 한 거야. 방이 뜨끈해지고 뜨거운 물이 나오니까 모두들 놀라 까무러치지.”
그날로 휴가를 받고 용돈도 받아 집으로 왔다, 그런데 그때부터 또 고생이 시작됐다. 훈련 대신 휴가증을 받아 보일러 시공 다니는 게 일이 됐고 매일 밖을 돌아다니는 그를 동료들이 곱게 볼 리 없었다. 남들은 6개월마다 하는 전속을 28개월만에 했으니 옮겨간 곳에서도 찍힌 상태였다. 전속 첫날 구타가 시작됐다. 야구방망이로 64대를 맞고 쓰러졌다. 손으로 맞은 건 뺀 숫자다. 그날 밤 술취한 부사관의 구타가 시작되는 것을 견딜 수 없어 야구방망이를 뺏어 그를 때려 눕히고 부대 뒷산으로 도망치고는 기절했다.
“눈을 뜨니 가시덤불 아래 눈밭이었어. 코피를 흘렸는지 앞섶은 피투성이고. 들고 도망친 야구방망이도 옆에 놓여 있더라고. 눈앞이 캄캄했지.”
부대로 돌아온 그는 곧바로 다른 부대로 옮겨갔다. 헌병대가 아니라는 것에 크게 안도했다. 그가 옮겨간 곳은 세상에 밝힐 수 없는 특수부대가 있는 섬이었다. 계급장도 부대 마크도 없었다. 비가 내리면 땅에 묻었던 석관과 유골이 드러나는 기묘한 그 섬에서 머무르며 원래 날짜보다 한참을 넘겨 제대했다.



사장 안전요원으로 고속 승진
졸업증명서 없어 퇴사하는 악운
 
다행히 군에서 수고했다며 취직을 알선해줬는데 우리나라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합판회사였다. 부산 다대포 반도목재에서 보일러 기관실 책임자로 일하던 중 한겨울에 보일러 물탱크가 터졌다.
“왜 그랬는지 아직도 모르겠지만 고드름이 얼고 바닷바람 매서운데 내가 새끼줄을 발에 감고 비닐을 뒤집어쓰고 물탱크로 올라간 거야.”
이 일로 그를 눈여겨 본 사장은 그가 해군 특수부대 출신이고 심해잠수가 특기라는 것을 알고 중요 인사들이 오면 동행하는 안전요원 임무를 맡겼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진급이 빨랐는데 그게 또 화근이었다. 공무계장으로 올라서며 증명서를 내야 했는데, 군입대 전에 다녔던 성동중고등학교는 군인이나 경찰관이 와서 가르쳤던 야간학교라 증명서 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오늘날 삼성, 현대 같은 대기업을 졸업증명서가 없어서 그만둬야 하는 것이 너무나 속상했다. 그래도 그에게는 용접기술이 남아 있었다.


중동에서 큰 돈 벌어, 사업도 승승장구
건설사 부도로 빚잔치 후 다시 나락으로
 
서른다섯. 아직 젊은 나이다. 다시 일어선 그는 용접기술을 살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1년간 근무했다. 이후 트리니다드 토바고라는 카리브 해안의 아주 작은 섬나라로 가 원양어선 수리공장에서 용접 배관공으로 일했다. 그의 기술을 눈여겨 본 현지 자동차 정비공장에서 그를 스카우트 했다. 그가 타국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까닭은 책을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영사전과 영한사전 두 개를 늘 가방에 넣어 다니면서 영어를 익혔어. 수입도 좋았지. 한국에서 20만원 벌 수 있던 시기에 거기서는 70만원, 100만원씩 벌었으니 꽤 컸지.”
목돈을 들고 대전으로 돌아와서 목공장 사업을 시작했다. 어찌 보면 이때가 전성기였다. 세 명으로 시작한 사업이 나중에 10명으로 늘었다. 노사분규 때문에 이 사업을 접고 인천 남동공단으로 가 기존 거래처에서 의뢰해 오는 일을 김해 목공단지나 인천 남동공단에 하청을 주었다. 입만 가지고 장사를 하니 이렇게 편할 수가 없고 수익도 상당했다.
“아뿔싸! 다시 운명이 장난치더라고.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불경기가 와서 건설사 7, 8개가 한꺼번에 무너졌어. 어음거래였으니까 전부 휴지조각이 됐지.”



일본으로 건너가 통번역자로 새출발
비자 문제로 강제 추방, 인생 다시 원점으로
 
빚잔치 후 절망에 빠져 한두 해를 보냈다. 세상에 대한 믿음도 미래에 대한 희망도 없는 시기였다. 일본에서 일할 노동자를 구한다는 구인광고를 보고 무작정 떠났다. 막노동이나 용접공으로 다시 고된 일상이 시작됐다. 여기서 버티려면 말이 통해야겠다는 생각에 또 다시 공부에 매진했다.
“요미우리 신문과 사전만 두고 시작했어. 처음에는 자그마한 한국 관련 기사 하나 읽는데 일주일이 걸리더라고.”
그렇게 쌓은 실력이 어느 새 통역이 가능할 만큼 능숙해지자 길이 열렸다. 통역이나 번역을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고 곧바로 컴퓨터 학원에 등록해 컴퓨터 문서작성도 마스터했다. 그리고 오십대 중반의 나이에 무역회사 통번역자를 뽑는데 합격했다. 일본에 온지 9년만에 다시 햇빛이 들었다.

“일본에서 하위직 공무원이 17만엔 받을 때 나는 두 배 가까이 받았으니 만족스러웠지. 일도 고되지 않고 시간도 많았고 좋아하는 책도 실컷 읽을 수 있었어.”
그러나 운명의 여신은 그가 행복하게 놔두지 않았다. 친구 회사를 통해 비자를 발급받았는데 회사가 망하는 바람에 비자가 중지된 거다. 그런데 하필 출장간 지역에서 검문이 필요한 사건이 터졌고 경찰이 그를 수상하게 여겨 불법체류자 신분이 발각됐다. 유치장에서 한 달, 출입국 사무소에서 한 달을 붙잡혔다가 통장에 들어 있는 돈만 받아 강제 출국당했다.
“주변에 큰돈을 빌려줘서 통장 잔액이 얼마 없었어. 신주쿠 아파트와 세간, 통번역하면서 6년 동안 모은 게 다 사라지고 우리돈 2천 만원만 들고 들어왔어.”


통역사무실, 귀농 모두 실패
다시 용접봉 쥐고 홀로 서다



꼭 15년만에 다시 밟은 한국땅. 너무나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스무군데 원서를 썼지만 목소리만 듣고 퇴짜를 맡았다. 예순 넘은 사람을 통번역가로 써줄 회사는 없었다. 서울에 통역 사무실을 차려봤지만 컴퓨터 번역이나 전화 번역이 발달해 수요도 많지 않았다. 경북 봉화로 내려가 시도한 귀농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 남은 돈 400만원을 들고 옛 터전이었던 대전으로 왔다. 열일곱 나이에 배고파 시작했던 용접봉을 다시 손에 쥐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았기 때문일까. 한신남 사장은 요즘 신이 난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용접 기술과 세련된 아이디어가 요즘 사람들 취향에도 맞는지 주문이 끊이지 않는다.
“피자 전문점에서 철공예품을 콘셉트로 잡았나봐. 철로 만든 인형과 샹들리에를 주문하더라고. 이 철인형은 내가 ‘춤추는 개구쟁이’로 이름 지었어. 하하하.”
명절이면 소외된 이웃들과 먹을 것을 나누는 일도 잊지 않는다. 마음이 적적할 때면 아내 생각이 나기도 한다. 꽃보다 더 아름다웠던 아내. 비록 힘든 시기 헤어져 지금은 보고 싶어도 볼 수 없게 됐지만 아직도 아내는 그의 기억 속에 꽃보다 더 아름답다.
여유가 있을 때는 아이비 한 자루를 정성껏 가꾸며 독서에 빠져 지내는 게 유일한 낙이다. 그래도 아직 남은 꿈이 있다면 조용한 시골에서 농기구나 고치며 자연과 사는 것.
“인생 9만리야. 아직도 할 일이 많다고.”
드라마 같은 인생을 웃음으로 인내하는 한신남 사장의 얼굴에 인생 달인의 면모가 엿보인다.

 
글 _ 배선희
사진 _ 안천호